디스이즈더리즌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장강명 소설

장강명, <표백> 中

“요즘 학생들 보면 이렇게들 패기가 없어서야 참 걱정이다 싶을 때가 있어. 세세한 스펙 따위 별 상관도 없으니 거기에 목숨 걸고 그러지 말고 큰 꿈을 가져봐.”

“그런데 왜 청년들한테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죠?”

내 물음에 H그룹 과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늙은이들더러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하겠니?”

숭배자들-A대학 경영학과 학생들-의 웃음.

“도전 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젊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젊을 때는 잃을 게 없고, 뭘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여러 가지 기회를 다 노려봐야 한다는 얘기지. 그러다가 뭐가 되기라도 하면 대박이잖아.”

“오히려 오륙십 대의 나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인생 저물어 가는데 잃을 거 없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은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일례로 시간을 2, 3년만 잃어버리면 H그룹 같은 데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잖아요. 나이 제한을 넘겼다면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경험이 남겠지.”

“무슨 경험이 있든 간에 나이를 넘기면 H그룹 공채에 서류도 못 내잖아요.”

“애가 원래 좀 삐딱해요.”

누군가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 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 <표백> p26,27 발췌 -

웹사이트

내가 만든 웹사이트

위의 에피소드는 SNS에도 많이 돌아다니는 걸 봤다. '표백'을 들어본 적 없더라도, 저 에피소드는 보지 않았을까. 세연이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웹사이트를 개설 했다는 소설 속 이야기를 보고 언젠가 내가 사이트를 만들게 되다면 꼭, 써먹고 싶었던 이름이었다. 이건 물론 웹사이트는 아니지만, 테마도 내가 만든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손때 묻은 블로그니까. 사실 이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개인 블로그를 가질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공개적인 공간에 글을 쓰는 건 컴퓨터를 잘해야하는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세상은 참 빨리 바뀌는 것 같다. 참고로 그 세연이 만든 사이트의 이름은 '와이두유리브닷컴'이었고, 3년 안에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적그리스도가 희망한 사이트는 '디스이즈더리즌닷컴'이었다. 그래서 내 블로그 주소를 디스이즈더리즌닷컴으로, 제목을 와이두유리브로 정했다.

마릴린맨슨 앨범

마릴린 맨슨'의 앨범 [Mechanical Animals]

'표백' 첫번째 소제목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작가가 말했듯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마릴린 맨슨'의 앨범 [Mechanical Animals]의 첫 곡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20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세대를 세연의 입을 빌려 '표백 세대'라고 했다.

세연 :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난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 <표백> p77,78 발췌 -

세연은 '자살'의 선행 조건으로 어떤 것도 아쉬울 게 없는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입학 장학생이고, 대기업 특채 합격해서 탄탄대로를 달릴 출발선에 선 그 순간에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 메시지를 담아 세연은 자살한다. 그것도 고개만 들면 살 수 있는 얕은 연못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 성공의 문턱에서 하는 자살선언은 충격적이면서도 어쩌면 행복감을 느낄 것 같기도하다. 목표 했던 성공사다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할테고, 그 성공 사다리가 어쩌면 중간에 부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없앤거니까. 한국에서는 한 해에도 많은 사람이 자살한다. 슬프게도 너무 흔한일이라서 언론에서 다뤄지지도 않는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자살'도 '자살선언문'은 보게 되지 않길..

쇼핑

소비하기 위해 버는 삶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 표백 세대, 그런데 진보나 보수, 이념을 고민하는 시대는 벌써 끝났는 걸. 내가 태어난 80년대 후반은 단군이래 가장 풍족한 세대였고, 자본주의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도저히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캐피탈리즘의 바퀴벌레로 살면서 내가 소비하는 제품으로 나를 드러내는 게 고작이고, 세대의 이데올로기나 서사가 없는 세대, '큰 꿈이 없는 세대'이다. 사소한 과업이나 이슈는 의미가 될 수 없는 걸까.

생각

위대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쨌든 이 블로그에는 내 생각의 흐름이 담겨질 예정이다. 위대하지 않아도, 나에게 거대 서사 따위는 없더라도 그냥 순간에 충실하면서 살다보면, 어딘가 방향을 잡아 출발하게 되지 않을까. 부유하는 삶도 나쁘지 않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제 보다 오늘 쬐끔 더 고민하고, 그만큼 똑똑해지고, 그 만큼 행복해지면 좋겠다.